박정근 / 대진대교수윌더니스문학 발행인시인. 소설가
박정근 / 대진대교수윌더니스문학 발행인시인. 소설가

필자는 초중등과 대학을 익산과 서울에서 다녔다. 본가는 행안면에, 생가는 산내면에 있었다. 귀향하려면 넓은 평야 지대를 지나 월성리에 들렀다가 변산으로 들어가며 바다를 맞이하는 여정이 반복되었다. 김제평야를 지나며 드넓은 지평선을 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오곤 했다, 하지만 부안 읍내를 지나 해창 갯벌에 저녁노을이 걸리면 저절로 ‘와’하고 솟구치는 생명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변산 일대는 대단히 화려하게 변화되었다. 새만금 사업으로 엄청난 비전을 내세우며 개발 논리가 판치는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여기저기 그럴듯한 펜션과 음식점, 찻집, 호텔과 콘도가 세워졌다. 요즘 관광객들은 부안의 변화를 두고 ‘상전벽해’나 ‘천지개벽’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왜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고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하기만 할까. 아마도 십 년 전에 이미 운명한 박영근 시인이 이곳에 와서 느꼈던 기분이 나와 같았으리라.
그는 ‘해창에서’라는 시에서 현재의 휘황찬란한 변산이 아니라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쌓인 선창, 조생이 자루 밀고 가던 여인, 길가의 감나무와 어부들의 안식처 갈매기 집, 비가 내리던 바다 등을 시에 재현하였었다. 현재적 시점에서 초라하고 남루해 보이지만 해창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서정적 이미지로 남아있는 개발 이전의 오브제들이 아닐 수 없다. 박영근의 시를 읽으면 변산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재의 새만금에서 느낄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치는 변산 해창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면서 노스탤지어에 잠긴다.
앞에서 언급한 이미지들이 해창의 주요한 오브제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박영근의 생태시에서 가장 상징적인 오브제는 단연코 갯벌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것들은 새만금으로 인해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는 갯벌의 부수적 존재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갯벌의 생명력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박영근은 이 시의 4연과 5연에서 “수십 킬로 뻘을 질러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타는 듯 붉은 노을이 내려/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온통 환하게 몸속을 열어 보이던 그때를 찾아/천천히 걸어 들어갈 뿐이다.//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갯벌을 건너”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수십 킬로나 된다는 거대한 새만금 방조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노을이 내려 붉게 타오르는 뻘이 방조제로 절단되어 있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온전하게 존재하던 과거의 해창 갯벌을 찾아 바다를 향해 한없이 걸어가고자 한다. 노을과 사랑에 빠져있던 갯벌을 중심으로 바다, 마을의 집들, 애기봉 모두가 사랑의 절정에 헐떡이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박영근은 이 시의 마지막 두 연에서 노을과 갯벌이 연출하는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사랑의 절정이란 모든 존재를 행복으로 치닫게 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두 위대한 존재가 행복한 관계에 있어야 종속된 존재들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개발론자들은 노을과 뻘의 우주적 사랑을 간과한 나머지 거대한 방조제를 세우고 뻘을 죽이는 우둔한 짓거리를 하고야 말았다. 수 없는 생명을 경시하는 가공할만한 반 생태적인 범죄가 아닌가. 거대한 뻘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수천만의 생명을 해치고 껍데기에 불과한 자본의 무덤 속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이다.
요즘 2006년에 건설한 반 생태적인 새만금 방조제에 대해 환경생태 운동가들은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생태 운동을 통해서 심각한 저항을 하면서도 개펄을 살리기 위해 매우 의미 있는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갯벌을 죽음의 무덤에서 생명의 터전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본다. 썩어가는 새만금호에 해수를 유통함으로써 생명의 씨앗을 심고 가꾸자고 호소하는 생태운동가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MB정권 하에서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정책은 4대강 사업이었다.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서 만든 개발론자들의 바벨탑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물이 썩어 냄새가 진동하는 녹조로 뒤덮이고 나서야 수문을 열어 생명 복원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동일한 맥락에서 적어도 새만금의 수위를 1.6M로 한다면 갑문 주위 수질이 대략 2급수에서 4급수 사이로 되살릴 수 있다고 생태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즉 배수갑문을 다 열면 2급수~4급수까지 최대한 복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새만금에 대한 어리석은 정책은 포기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33킬로의 방조제로 갇힌 죽어있는 물을 540미터 전체 갑문을 연다고 금방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급하게 생명의 줄기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새만금은 영원히 죽음의 땅으로 버림을 받을 것이다. 2주일의 잼버리 대회를 위해 흙을 돋우는 정책은 새만금 복원의 꿈에 역행하는 것이며 갯벌을 살리자는 군민들의 호소를 저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만금의 갯벌을 되살리자는 의지를 집약시키기 위해 새만금 방조제 입구에 개발 전의 아름다운 해창 갯벌을 노래한 박영근 시인의 시 ‘해창에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의 시를 통해 새만금의 새로운 정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박영근 시인의 시비 세우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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